어제 뉴스를 보다가 내 눈과 귀를 의심했다. 민노당 이정희 국회의원이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했다는 뉴스였는데, 도대체 시대가 언제인데 이런 뉴스를 접해야 하나 싶었다. 나야 죽었다 깨어나도 기무사 등으로부터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할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당하는 사람의 입장이라면 이 얼마나 가혹하고, 무시무시한 일이 아니겠는가.
얼마전 쌍용자동차 노조의 시위 때도 그런 생각을 했다. 몇달씩 월급도 못 받다가 어느날 갑자기 정리해고를 당한 입장에서 보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점거농성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 이것이 'empathy'라고 배웠다. 이 단어는 문학이나 심리학, 사회학 등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데 흔히 '감정이입'이라고도 하고, '공감'이라는 말로도 번역된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엇물리는 현대사회에서 'empathy'는 상당히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사회 내의 'empathy'를 생산하고, 확대하는데 미디어의 힘과 역할은 더욱 중요하고 책임감이 필요한 부분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MB정권 하의 미디어들을 보고 있자니, 하나같이 empathy는 커녕 -이런 단어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dispathy에 가까운 게 아닐까. 즉, 통합이나 공감보다는 분열을 조장하고, 같은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조차 파편화시키고, 소외시키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는 모두가 노동자일뿐이고, 노조 역시 그냥 노종일 뿐이다. 그 속에 '귀족노조'가 있을리 만무하다. 물론 다른 노동자들/노조들에 비해 특정 노동자/노조의 임금수준이 높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일반 노동자/노조와 계급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이 다른 노동자들을 욕하고, 정규직들이 오히려 비정규직들을 박대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상대적 약자인 임시직/비정규직들을 박대하게 되면 결국 정규직들도 나중에 찬밥 신세가 될 수 있다는 empathy를 갖는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 -여기서 민간인은 민노당 당직자라고 함-을 그냥 보아넘기다간 언젠가 "죽었다 깨어나도 기무사 등으로부터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할 일이 없다"고 믿는 나나 내 가족이 언제든 감시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라. 끔찍한 일이 아니겠는가.
복지부동의 대명사 공무원들이 노조를 만들고, 월급 많이 주고 휴가도 많이 주고 여가도 많은 대기업의 노조들이 파업을 할 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이전에 그들도 나와 같은 노동자들이고, 그들이 투쟁에서 얻는 것이 있다면 결국 나와 같은 노동자들, 그리고 비록 현재는 덜 배려받는 노동자들에게도 결국 이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