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14

KBS는 수신료 인상에 앞서...



intro...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소설 <1Q84>를 읽고 있다. 거기에 '덴고'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아버지가 NHK의 수신료 징수원으로 어린 시절 아버지와 일요일마다 수신료를 걷으러 다니던 기억을 갖고 있다. 때마침 인터넷 뉴스를 통해 KBS가 방송 수신료 인상을 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 방송 수신료? 내가 알기로 시청료 또는 수신료는 영어로 license fee다. 영어를 직역하자면 '면허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시청료나 수신료로 표현하는 것은 과연 적절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왜냐면 우리가 방송사에 지불하는 돈이 프로그램 시청의 대가라거나 전파 수신의 대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대가'라는 개념이라면 KBS나 BBC, NHK는 유료방송이란 말인가? 그게 아니라 공영방송은 국민으로부터 공공재인 전파를 사용해 방송프로그램을 만들고, 방송해 달라는 요구를 공적으로 위임을 받은 조직(공적 위탁자)이고, 시청자들은 이런 공적 방송을 수신하기 위해 수상기와 함께 면허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면허를 유지하기 위해 일정 금액을 지불하자는 것이 공영방송의 license fee가 성립하게 되는 근거이다. 즉, KBS와 같은 공영방송 조직은 사기업과 달리 경영을 통해 흑자를 늘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참고로 2009년 8월까지 KBS는 138억원의 흑자를 기록했다며 보도자료를 냈다.

징수방식부터 바꿔라!

한국방송(KBS)이 텔레비전 방송 수신료를 인상하고자 한다면, 그에 맞춰 수신료 징수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알다시피 지금 수신료는 전기요금에 합산되어 나온다. 누구나 사용하는 또는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전기요금이니 수신료만 따로 내지 않을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그렇다. KBS는 우리, 시청자들이 미처 눈치채기도 전에 시청자들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구조' 속에 가둬 버린 것이다.

KBS는 이렇게 강제적인 징수방식이 자랑스러운지 BBC나 NHK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을 따라하려 한다고 떠벌리기도 한다. 하지만 시청자들, 국민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아 실행은 되지 않고 있다. 즉, 적어도 우리나라보다 공영방송의 철학이나 전통이 오래되었고, 확고한 나라들에서는 이런 징수방식이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면 시청자들이 무서우니까.

정치도 그렇지만 방송 역시 국민 무서운 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KBS는 어떠한가? 아날로그 시절 국민의 재산인 전파를 사용하기에 당연히 부과된 공공 서비스 확대는 커녕 디지털 시대 보편적 접근권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철밥통 지키기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게 아닌가.


KBS의 조직도를 보면 정말 어마어마한 조직인 것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조직에 5천명 이상의 인력이 들어가 있다. 근데 이 조직 외에 KBS에는 다양한 출자회사와 자회사가 있다. 심지어 자회사들을 관리하는 지주회사격의 자회사(e-KBS)까지 있을 정도다. 뭐 MBC-iMBC, SBS-SBSi 등 타 지상파 방송사들도 모두 i자회사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으나, KBS는 태생부터 다른 공영방송 아닌가 말이다.


물론 BBC나 NHK도 수익사업을 위한 별도의 조직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KBS가 돈벌이에 열을 올리고, 조직의 비대화와 철밥통화가 옳다거나 그냥 넘어갈 일은 결코 아니지 않은가.

인상은 하되, 진정한 '국민의 방송'으로 거듭나야

결론적으로, 지난 수십년간 동결되었던 수신료(시청료가 됐든 면허료가 됐든 간에) 인상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에 앞서 KBS는 해결해야 할 일들이 무척이나 많이 있다. 단순히 경영합리화니, 공적서비스의 확대니, 디지털 전환에 대비해야 한다는 대의명문보다는 수신료를 둘러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대안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해야만 하는 것이다.



2009/08/19

소통


故김대중 前대통령의 장례식에 모습을 나타낸 이창동 前문화부장관의 사진을 보니, '아~ 저 분도 문화부장관이었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심에 검색을 했더니, 이창동 전장관이 취임식 대신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취임사를 찾아냈다. 영화감독 이전에 소설가였기에 두서없이 쓴 글이라면서도 문단마다 옳커니 싶은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다소 길지만 두고두고 되새길만한 글이라 여기기에 스크랩 해 두련다.



제가 문화관광부 장관이란 중책을 맡은 지 어느새 두 주일이 훌쩍 지났습니다. "취임식을 생략하는 대신 취임사는 인터넷으로 올리겠다."고 약속을 해놓고도 이제사 인사의 글을 올려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럴싸한 포부나 의례적인 인사보다는 뭔가 생각을 가다듬어 말씀을 드리고자 했지만, 취임한 이후 지금까지 너무나 정신없이 바쁜 일정을 보내느라 단 30분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어쨌든 무엇보다 먼저, 취임한 첫날부터 지금까지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도와주신 여러분들께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지난 3월 1일 국립극장에서 3·1절 기념행사를 마친 뒤 대구로 내려가 지하철 참사 현장을 다녀왔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그 형체도 찾지 못하는 유가족들의 핏발선 눈들을 만날 수 있었고 시커멓게 그을음으로 뒤덮인 지하철역 구내 곳곳에 깨알같은 글씨로 쓰여진 망자들의 온갖 아름답고 슬픈 사연들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참담한 심정과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치는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껴야 했습니다.
한 성격이상자의 우발적 범죄, 또는 우리 사회의 안전불감증, 재난 시스템의 부재 등, 많은 이유와 원인을 말하고 있지만, 저는 그 가운데서도 주범은 한국사회의 '관료주의'라고 말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한낱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사건을 이처럼 끔찍한 비극으로 확대시키고 악화시킨 것은 분명 아무도 스스로 책임지거나 판단하지 않는, 오직 무사안일 속에 자신을 숨기고 마는 '관료주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일찍이 자신의 소설을 통해 개인의 운명과 성스러운 실존적 삶이 관료들이 앉은 책상들과 서류더미 사이로 내던져지고 결정되어지는 관료주의의 거대한 성(城)을 묘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카프카의 뛰어난 상상력으로도 수백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두 대의 전철 안에 갇힌 채 2000도 가까운 고열로 통째로 불타고 있는 그 무시무시한 묵시록적인 광경을 감히 상상해낼 순 없었을 것입니다. 그 무고한 피해자들은 오늘 합동분향소의 영정사진으로, 또는 실종자 가족의 애타는 호소문 속에 남아 있는데, 가해자들은 어디 있습니까?
가해자들의 맨 앞에는 자신이 이 사회 전체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다고, 아무도 자신의 사정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뒤틀리고 왜곡된 심사의 한 초라한 사내가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뒤에 늘어서 있는 수많은 다른 가해자들은 마치 흐릿한 그림자처럼 이름도 얼굴도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 얼굴 흐릿한 익명의 가해자들 중에 '나'도 끼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 공직자들은 뼈아프게 자인해야만 합니다.
첫 인사말에서부터 이런 무거운 이야기로 시작해서 송구스럽지만, 참여정부의 출범 직전에 터진 이 사고를 저는 이제 막 공공의 직무를 시작하는 저 자신을 위한 무거운 교훈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사고가 난 뒤 전에도 늘 그랬듯 우리는 지금 우리 사회의 안전 시스템을 부산하게 재점검하고 있습니다. 재난에 대한 효율적 관리를 위하여 새 정부는 재난방지청의 신설을 준비하고 있고, 각종의 안전에 관한 매뉴얼도 만들고자 합니다. 물론 마땅히 해야만 할 일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적 접근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시스템이 개선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그 시스템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대구 지하철에서 증명되었듯이 수많은 모니터가 있어도 그것을 들여다볼 사람이 없었고, 고급 통신장비가 있어도 가장 위급한 순간에 최소한의 필요한 정보조차 주고받질 못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날 사고가 나던 대구 지하철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소통이 막혀 있었습니다. 자신이 이 사회와 전혀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사내는 플라스틱 휘발유 통을 들고 소통 대신 파괴를 선택합니다. 1079호, 1080호의 기관실과 조종실 사이에도 의사소통이 막혀 있으며, 객차에 있는 무고한 시민들은 한 마디의 경고도 듣지 못한 채 운명의 시간 직전까지 그냥 앉아 있습니다. 사고 발생 후, 대구시 당국과 희생자 가족들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소통의 기능이 얼마나 막혀 있는가를 비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현대사회에서 '소통'이란 그 사회의 성격과 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즉 과거에는 사회가 신분이나 집단으로 구성되었다면, 오늘날에는 의사소통으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사회가 민주화 되었다는 증거를 얻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의 방식이 민주화 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정치적 제도는 민주화 되었으면서도 그 소통의 방식은 전혀 민주화 되지 않았습니다. 청와대와 행정부, 국회와 정당에 이르기까지 의사소통의 사회적 기능을 맡은 공적조직은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에 눌려 마비되고 왜곡되어 기형화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대구지하철 사고는 그것의 비극적이고 상징적인 예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화'를 생각하게 됩니다. 흔히 문화의 역할이란 지하철역 구내에 보다 세련된 의미있는 장식물이나 걸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우리네 삶에서 문화란 그런 작은 디테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보다 본질적인 것, 즉 사람과 사람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의 소통의 형식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이 곧 문화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천년,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기에서 인류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도도한 물결을 이루고 있는 정보통신 기술, 컴퓨터, 디지털 문명 등이 이미 우리의 일상을 시시각각 바꾸어놓고 있음을 우리는 생생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문명이 엄청난 양과 속도로 실어 나르고 있는 것은 바로 소위 '문화 컨텐츠'라고 불리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새로운 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명명하는 것입니다. 문화를 정치나 경제의 부수적인 영역으로 보는 낡은 시각으로는 결코 오늘의 변화에 대처해낼 수 없습니다. 문화예술적 창의성과 자율성이 모든 생산·유통·소비 영역에서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모든 영역에서 문화적 관점이 요구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바로 이런 새로운 세기의 출발점에서 참여정부가 출범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또한 앞으로의 문화적 변화를 주도할 중대한 역할이 바로 우리 문화관광부에 맡겨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가슴 깊이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문화가 산업적으로 중요하다는 인식은 지난 정부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화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또 상당한 성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화의 산업적 논리에는 상당한 오해가 존재합니다. 즉, 문화를 산업적, 또는 경제적 측면으로만 바라본다면 '문화도 돈 된다'는 식의 단순논리에 머물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 되는' 문화(이를테면 게임이나 영화, 에니메이션, 관광 등)는 투자, 육성하고, '돈 안되는' 문화(문학, 연극, 미술, 박물관 등)는 직접 지원해서 보호한다는 분리적 접근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근본적으로 지난 시대의 낡은 패러다임에 사로잡혀 있다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제 '문화도 돈 된다'가 아니라, '돈 되는 문화, 돈 안되는 문화가 따로 없다'는 사고로 바뀌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경제적 관점에서 문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관점에서 경제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화가 새로운 세기를 이끌어 나갈 것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문화상품들이 중요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문화적 형식과 관점, 문화적 자율성과 창조성이 모든 영역에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참여정부의 문화관광부의 정책은 이런 관점에서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각 영역에서 문화적 창조성과 자율성의 불씨를 불어 일으키도록 환경을 만들고 틀을 짜도록 하는 것이 정책의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모두가 '돈 되게' 할 수 있고, 나아가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향으로 가기 위한 첫 번 째 과제 또는 목표는 문화예술, 체육, 관광 등의 각 분야에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각 분야에서 스스로 고민하고, 의견을 모으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정책을 만들어 집행하도록 하며 정부는 지원만 할 뿐 민간에 권한과 책임을 대폭 넘겨주는 것으로 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문화란 자율과 창조가 생명인데, 지금처럼 정부의 관료들이 책상 위에서 정책을 만들어 현장으로 내려보내는 방식으로는 그 자율과 창조성을 살려낼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물론 이것이 말은 쉽지만 매우 어려운 과제라는 사실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 각 분야의 현장에 그만한 자율성을 갖추고 있는가, 또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살펴보면 하면 사정은 그리 낙관적이지 못합니다. 각 분야마다 온갖 갈등과 이해관계가 상충하고 있으며, 자율적 논의를 하고 의견수렴을 할 수 있는 토양도 사람도 부족한 것이 솔직한 현실입니다. 아마 숱한 어려움과 좌절을 겪을 것임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우리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정부가 분명히 그런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점을 알리고, 그들이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비효율과 시행착오가 드러나더라도 정부는 인내하고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문화행정에 있어서 민간의 자율적 참여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제도, 어떤 시스템과 방법이 필요한지 연구하고 마련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문화에 있어서 개혁의 분명한 방향이며, 참여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자율, 개방, 그리고 참여와 분권이라는 개혁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관인 제 개인만의 믿음도 아니며 참여정부의 의지만도 아닙니다. 시대의 흐름과 세계사적 변화의 요구이며, 오히려 우리나라는 너무나 늦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란 삶의 형식이며 동시에 본질입니다. 우리가 개혁을 이야기합니다만, 삶의 형식이 바뀌지 않는 한 그 본질은 결코 바뀔 수 없습니다. 장관이 되고 난 뒤에 저는 우리 행정부 내의 권위주의적 문화에 대하여 꽤 놀랐습니다. 임명장 수여식, 취임식 등에서부터 장관에 대한 의전에 이르기까지 행정부 내에서 지켜져 오고 있는 관습과 문화가 일반대중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권위주의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장관실 앞에만 깔려 있는 붉은 카펫, 장관이 나타나면 부동자세로 서 있는 직원들, 행정고시를 통과한 사무관 비서가 꼬박꼬박 장관의 차 문을 대신 열어주는 것, 장관에게 누구나 허리를 90도로 꺾고 절을 하는 모습을 보며 저는 좀 실례되는 비유인지 모르겠으나 '조폭문화'를 연상했습니다. '조폭'이란 조직의 특징은 그것이 일반사회와 격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격리되어 있으므로 자기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그래서 곧잘 영화나 드라마에서 흥미롭게 묘사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행정문화 속에 이런 권위주의적인 독특한 문화와 관습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은 행정부와 일반국민과의 거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께 우리 문화관광부에서부터 과감히 이런 권위주의적 관습과 문화를 버리자고 권합니다.
장관이라는 직위에 걸맞는 권위와 책임을 인정하고 자연스런 예의를 표시하는 것과 권위주의적인 형식을 통해 장관을 대접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공무원이므로 반드시 넥타이와 양복을 매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과 공무원으로서의 품위와 도덕적 엄격함을 지녀야 한다는 것 또한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저는 영화감독으로서 해외를 다니며 그 나라 문화부 공직자들을 더러 만나보았지만 그 누구도 복장에서부터 '공무원 냄새'를 피우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복장이 자유로운 만큼 그들의 사고와 행동은 자유롭고 유연했습니다. 그런데도 21세기의 언필칭 세계화 시대에 아직도 우린 장관이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느냐 어쩌냐가 신문 방송의 뉴스꺼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권위주의적인 문화 속에서 진정한 토론, 소통과 이해가 이루어지리라 믿을 수는 없습니다.
문화예술 행정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문화예술인이 되어야 합니다. 체육행정과 관광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공직의 의무 속에 갇혀 있지만,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그들과 끊임없이 교감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우리는 권위주의의 두꺼운 철갑 옷을 벗어 던지고 부드러운 문화의 비단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문화관광부가 국민들에게 '문화가 어떻게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꿈을 부여하는지' 안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여기에 우리 문화관광부의 위상이 자리 매김 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함께, 감동이 살아 있는 문화 행정을 펼쳐나갈 것을 약속하면서 두서없는 인사말을 마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2003. 3월 13일 오후 이창동



2009/08/18

기억


부산 토박이인 나는 정확히 1997년 3월부터 1999년 3월까지 전남 목포에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남 무안군 삼향면 지산리에 있는 모 예비군 부대에서 군 생활을 했다. 그곳은, 목포와 신안의 예비군들을 상대로 1년 내내 예비군 훈련일정으로 빡빡한 일상이 반복되던 그런 곳이었다. 예비군들이 들어오면, 내 말투와 억양을 듣곤 조건반사식으로 "너, 경상도에서 왔냐?"란 질문을 던졌다. 그곳에서 나는 이방인이었다.  

1997년 겨울이 다가오면서 전국은 대선의 분위기로 물들었다. 어떤 예비군들은 나에게 김대중 후보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참고로 故김대중 前대통령의 고향인 신안 하의도 역시 우리 대대에서 예비군 교육을 실시하는 곳이다.) 그들에게 있어 '김/대/중'이란 인물은 -당시의 분위기를 떠올리자면- 대단히 존경받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전혀 정치적이지 않았던 나로서는 다소 시큰둥한 반응으로 되돌려 주었다.

1997년 12월 어느날, 육공 트럭을 타고 투표를 하러 시내에 나갔다 왔다. 내가 누굴 찍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날 밤(정확히는 그 다음날 새벽), 위병소 근무를 나갔을 때 멍 하니 어서 근무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부대 아래쪽 마을에서 '와-'하는 함성이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대한민국 만세!" 소리도 들렸다. 그 이후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오는 그 지역 예비군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김대중 대통령 당선'을 화제에 올렸다. 그렇게도 원하는 대통령이었다.










2009/08/17

해운대 센텀시티

장산에서 바라 본 해운대

야간에 해운대 장산에 오르면 멀리 다이아몬드 브릿지(광안대교)와 함께 개발이 진행중인 센텀시티 지구의 화려함이 부산이란 도시의 색다른/새로운 매력을 선사한다. 대청동 중앙공원 등에서 바라보는 부산항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센텀시티의 모습은 아직 낯설다.


해운대에 공항이 있었다?

그렇다. 해운대구 우동 센텀시티에는 1996년 중반까지 '부산수영공항'이 있었다. 한국전쟁때에는 유엔군 비행장으로 활용되었던 이 곳은 1959년 9월 한국 최초로 민간 항공기가 취항하기도 하였다. 이후 부산수영공항은 1963년 9월 '부산국제공항'으로 승격하였지만, 1976년 8월 김해국제공항이 개항하자 군 전용공항으로만 사용되었다.

부산시는 1994년 4월 수영공항 일대를 최첨단 정보단지로 개발하기 위해 국방부와 부지 매매계약을 맺는다. 한국 최초 민간 항공기가 취항한 부산수영공항이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2009/08/15

entropy


엔트로피 entropy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세종연구원


<종말>시리즈로 널리 알려진 제레미 리프킨. 학부시절 뉴미디어와 관련된 리포트를 쓰기 위해 <소유의 종말>을 억지로 읽었던 기억은 있다. 당시에도 별다른 감흥은 없었던 것 같은데, 다소 뻔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어렵고, 길게 늘어놓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지난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 직후 각 방송사별로 나온 특집 프로그램을 챙겨 보다가 노 전대통령의 서재에 가지런히 놓인 책들에 눈길이 갔다. 바로 스티글리츠의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와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 <수소혁명>이었다. 과연 노 전대통령은 제레미 리프킨을 읽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MBC스페셜 캡처

<엔트로피>는 제레미 리프킨의 초기 저작(1980년)이다. 어떻게 보면 뒤이어 나올 <종말>시리즈의 서막에 해당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353페이지나 끌고 나갈만한 '뭔가 대단한' 아이디어는 없었다. 물론 책이 나온 지 30년이 지났기에, 그의 주장들이 -당시에는 참신했을지 몰라도- 이제는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흔한 주장이 되어 버린 탓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이해하는데 있어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법칙, 그리고 열역학 제1법칙 등에 대해 약간의 지식이 필요하다. 열역학 법칙은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며(제1법칙), 엔트로피 총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제2법칙)으로 이뤄져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 르네 데카르트, 아이작 뉴턴 등이 공헌한 현재의 기계론적 세계관에 따르면 이성이 감성보다 우선하며, 자연은 통제가능하며, "역사는 질서있고 완벽하게 예측가능한 상태로의 지속적인 진전"하고 있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실제로 우리는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그리고 대학4년 등 고등교육을 받으며 이와 같은 세계관을 뼈속 깊숙히 받아들였다.

이제 리프킨은 그러한 기계론적 세계관을 엔트로피라는 새로운 세계관으로 대치하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역사는 완벽을 향한 끊임없는 성장과 진보가 아니라 -반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생명체의 활동으로 오염은 늘고 유용한 에너지의 총량은 줄어들며, 거대한 무질서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결론부분으로 나아가면, 이제 리프킨은 그동안 현대인을 지배해 온 기계론적 패러다임을 대치해 새로운 엔트로피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저엔트로피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엔트로피 사회란, 석유나 가스와 같은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의 사용을 줄이고, 에너지 흐름의 절대량을 줄여 적은 양의 에너지를 사회 구성원 전체에게 좀더 균등하게 분배하는 것으로 실현될 수 있단다. 즉,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다"라는 격언을 받아들여 '소비'나 '물질적 풍요'보다 "검소하고 질박한 생활을 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현대인이 숭상해 마지않는 물질적 진보, 효율, 전문화 같은 개념을 버리고, 파괴되고 버려졌던 가족, 공동체, 전통의 가치가 되살아나 모두가 건강하고, 존엄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란다.

책의 전반부에서 베이컨, 데카르트, 뉴턴 등을 인용하며 현대적 세계관(기계론적 세계관)을 비판하며 문제제기를 하는 것까지는 뭐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결론 부분으로 나아가며 그가 내놓는 주장들은 대단히 낭만적이다. 다시 말해 비현실적이란 말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어차피 우리는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오염은 증가하고 유용한 에너지는 줄어드는 역사의 과정 속에 놓여있다. 이 자체를 되돌리수는 없다. 하지만 엔트로피의 진행 속도를 늦추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니 다들 고대 아니 산업혁명 이전 시기로 돌아가 유용한 에너지를 가능한 적게 쓰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의 전부이니... 이것 참...






正道! 스스로 알아서 하자!

에이미트FC 홈페이지

영화배우 김민선씨의 글 때문에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며 고소한 에이미트의 쇠고기브랜드 에이미트FC의 홈페이지다. 경영철학이 어째... 부디 제발 正道를 걸으시고, 스스로 알아서 하시길...

2009/08/14

난독증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대화를 하다보면, 꼭 화제(話題)나 본질에서 벗어나 말꼬투리를 물고 늘어지는 놈이 하나씩 있다. 대개의 경우, 이런 친구는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거나 초지일관된 자기만의 입장이나 견해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산 쇠고기 수입업체가 1년전 자신의 미니홈피에 올린 글을 빌미로 영화배우 김민선을 고소하면서 불거진 '공인으로서 연예인의 사회적 발언 파장' 문제가 국회의원 전여옥씨의 글, 다시 동료 영화배우인 정진영씨의 반론 등으로 이어지면서 연예인은 공인인가? 아니면 공인이기 이전에 시민인가?, 연예인은 사회적 발언을 할 권리가 없는가? 하는 논쟁으로 치닫고 있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논쟁을 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딴따라로만 치부되던 연예인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부분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것이 뭐가 나쁜가? 그리고 -동의하진 않지만- 과연 김민선의 미니홈피 글이 미국산 쇠고기수업체의 파산과 직간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는지는 여러 시각에서 한 번 이야기해 볼만한 사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당혹스럽게도 변희재는 갑자기 '(연예인)니네들이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냐?'는 자질론을 끄집어냈다. 심지어 "한국의 연예인들은 연예기획사의 나팔수에 가깝다"며 글 끝부분에서는 "이번 기회에 한국 연예기획사들 전체의 고질적인 병폐를 구조조정하여 부도덕한 기업과 스타들을 퇴출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 변희재의 난독증(難讀症) 증세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번 글 역시 그의 경쟁력인 난독증으로부터 글은 시작한다.



인용1) "내가 놀란 것은 이 글에서 정진영이 김민선과 통화한 내용을 공개했는데, 김민선이 “뭐 어쩌겠어요. 가만 있어야지요”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글쎄. 김민선이 정진영과의 전화통화에서 했다는 저 말을 변희재는 사고 쳐놓고 나 몰라라하는 무책임하고 뻔뻔한 것으로 받아들였나 보다. 하지만 내가 지금, 지극히 개인적인 내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내 글이 가져올 부정적 파장을 고려하고 있냐면 그건 아니다. 물론 나는 연예인도 아니고 공인도 아니다. 하지만 연예인이나 공인도 자기 공간에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할 권리가 있는 거 아닌가. 이 점에 대해서는 변희재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인용2) "연예인도 자기 주장할 수 있다. 그 주장이 잘못되었고, 그에 피해자가 있다면 최소한의 반성과 사과를 할 수 있는 자세라도 갖추라는 것이다. 그런 자세가 없다면 발언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내 블로그에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썼는데, 1년쯤 지나서 내 글로 인해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다면 나는 '무조건' "잘못했습니다"라고 해야 한단 건가? 나는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 그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는 업자들 망하라고는 안했는데... 결과적으로 쇠고기수입업자들 중 누군가가 파산을 하기도 하고(근데 누가, 어떤 업체가 파산을 했는데?), 매출이 늘지 않으니 그게 모두 내 책임이고, 내가 물어내야 한다고? 쇠고기 수입업자들에겐 유감스러운 부분이긴 하지만 그런 책임을 특정 개인에게 묻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객관적으로 발언-매출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증명하기가  쉽지 않고, 나 역시도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것인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은데... 그래서 "뭐 어쩌겠냐. 가만 있어야지"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직접 전화통화를 해 보지 않은 제3자의 상황에서, 단 두 문장으로 그가 무책임하다느니 뻔뻔하다는 단정을 내리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음에도 변희재는, 자신이 가진 연예인에 대한(또는 자기 자신을 제외한 타인들에 대한) 선입관을 그대로 드러낸다.

인용3) "이것은 김민선의 문제가 아니라, 김민선의 소속사인 TN엔터테인먼트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한국의 연예인들은 연예기획사의 나팔수에 가깝다. 지금 당장이라도 TN엔터테인먼트가 움직이면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안 하고 있다. 쇠고기 파동 당시 김민선 뿐 아니라 수많은 아이돌스타들이 광우병 쇠고기 관련 발언을 했다. 인터넷 마케팅용이었다. 자기들의 돈벌이를 위해서 전 국민, 특히 10대를 공포로 몰아넣은 것이다."

지난해 촛불시위 때 수많은 아이돌스타들이 인터넷 마케팅용으로, 돈벌이를 위해서 광우병 쇠고기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에 대한 객관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게다가 터진 게 입이라고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깎아 내리는 망언도 서슴없이 해댄다.

인용4) "김민선은 물론 정진영조차도, 사회적으로 파장을 미칠 만한 자기 의견을 개진할 지적 수준은 안 된다는 것이다. 지적 수준이 안 되는 자들이 인지도 하나만 믿고 자기들의 의견을 밝히기 시작할 때, 대한민국의 소통체계는 일대 혼란에 빠진다."  

이런 배타적이고, 독불장군식의 아집과 편견으로 대한민국의 소통체계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코미디에 가깝다. 그리고 변희재에게 한 마디 덧붙이자면, "반사!~"

변희재의 글을 자꾸 인용하다보니 나 역시도 '말꼬리잡기 놀이'의 재미에 푹 빠진 것 같다. ㅡㅡ" 에잇... 그건 그렇고, 애초에 내가 하려던 이야기는, 김민선은 미국산 쇠고기수업자들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미국 쇠고기 전체가 광우병에 걸렸다는 것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진짜로 미국 쇠고기를 청산가리와 똑같다고 한 적이 없다는 거다. 이 정도는 누구나 다 아는 거니까 굳이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하는 게 웃기는 일 아닌가. 글의 의미와 문맥, 맥락을 읽기보다는 표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고, 지엽적인 부분에 큰 의미를 두려고 하는 모습을 보려니 정말 눈물겹다.



근데 말이다. 이 <빅뉴스>라는 사이트의 정체가 뭐냐? 인터넷신문인지, 컬럼 사이트인지...

Empathy

어제 뉴스를 보다가 내 눈과 귀를 의심했다. 민노당 이정희 국회의원이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했다는 뉴스였는데, 도대체 시대가 언제인데 이런 뉴스를 접해야 하나 싶었다. 나야 죽었다 깨어나도 기무사 등으로부터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할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당하는 사람의 입장이라면 이 얼마나 가혹하고, 무시무시한 일이 아니겠는가.
얼마전 쌍용자동차 노조의 시위 때도 그런 생각을 했다. 몇달씩 월급도 못 받다가 어느날 갑자기 정리해고를 당한 입장에서 보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점거농성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 이것이 'empathy'라고 배웠다. 이 단어는 문학이나 심리학, 사회학 등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데 흔히 '감정이입'이라고도 하고, '공감'이라는 말로도 번역된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엇물리는 현대사회에서 'empathy'는 상당히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사회 내의 'empathy'를 생산하고, 확대하는데 미디어의 힘과 역할은 더욱 중요하고 책임감이 필요한 부분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MB정권 하의 미디어들을 보고 있자니, 하나같이 empathy는 커녕 -이런 단어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dispathy에 가까운 게 아닐까. 즉, 통합이나 공감보다는 분열을 조장하고, 같은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조차 파편화시키고, 소외시키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는 모두가 노동자일뿐이고, 노조 역시 그냥 노종일 뿐이다. 그 속에 '귀족노조'가 있을리 만무하다. 물론 다른 노동자들/노조들에 비해 특정 노동자/노조의 임금수준이 높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일반 노동자/노조와 계급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이 다른 노동자들을 욕하고, 정규직들이 오히려 비정규직들을 박대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상대적 약자인 임시직/비정규직들을 박대하게 되면 결국 정규직들도 나중에 찬밥 신세가 될 수 있다는 empathy를 갖는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 -여기서 민간인은 민노당 당직자라고 함-을 그냥 보아넘기다간 언젠가 "죽었다 깨어나도 기무사 등으로부터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할 일이 없다"고 믿는 나나 내 가족이 언제든 감시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라. 끔찍한 일이 아니겠는가.

복지부동의 대명사 공무원들이 노조를 만들고, 월급 많이 주고 휴가도 많이 주고 여가도 많은 대기업의 노조들이 파업을 할 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이전에 그들도 나와 같은 노동자들이고, 그들이 투쟁에서 얻는 것이 있다면 결국 나와 같은 노동자들, 그리고 비록 현재는 덜 배려받는 노동자들에게도 결국 이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자.